한국조선, 최고 선가 경신 행진
우리나라 조선업계의 역대 최고가 신조선 계약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친환경 규제, 효자 선종 선가 상승 등으로 조선사들의 가격 협상력이 높아졌다는 분석을 전합니다.
지난 22일 현대미포조선은 공시를 통해 유럽 소재 선사로부터 컨테이너선 5척 건조 계약을 4,145억원에 수주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이어진 Tradewinds 보도에 따르면, 선박들은 1,300-teu급 피더 컨테이너선으로, 척당 가격은 6,200만불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존 화석연료 추진 피더 컨테이너선의 건조가(약 2,500만불)의 2.5배에 달하는 선가는 추가된 친환경 장비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선박들은 풍력 및 메탄올을 사용하는 이중연료 추진선으로, 한 업계 전문가는 "이러한 고선가의 피더 컨테이너선은 여태껏 건조된 적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친환경 선박의 선가 상승은 글로벌 환경 규제 강화로 인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30년 이후 발주되는 선박에 대해 2008년 대비 탄소 배출량을 40%, 2050년에는 70%까지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환경 규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으며, 향후 20년 안으로 세계 선대의 상당 물량이 무배출(zero-emission) 선박으로 교체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IMO는 올해 화물 1톤을 1마일 운송하는데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을 사전에 지수화한 에너지효율지수(EEXI) 및 1톤의 화물을 1해리 운송하는데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을 사후 지수화한 탄소집약도지수(CII) 규제를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국내 조선사의 효자 선종인 LNG운반선의 선가 또한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2억 5,000만불 선에 머무르던 LNG운반선 선가는 현재 약 2억 6,000만불까지 오르며 최고가를 경신했습니다.
지난 3월 말, HD한국조선해양은 공시를 통해 자회사 현대삼호중공업의 LNG운반선 2척 수주 소식을 알린 바 있습니다. 오세아니아 소재 선사로부터 수주한 선박의 선가는 척당 2억 5,900만불로, 역대 최고가입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재 3년치 도크가 차 있는 상황에 주문이 몰리며 우리나라 조선업계의 가격 협상력이 전보다 높아진 상황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지속되는 수주 강세를 바탕으로 조선소들의 수주잔고가 쌓이며, 구매자(buyer)인 선주사들이 오히려 선가 등 협상력이 떨어지는 관계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높아지는 선박 건조가에 더해 조선업계의 조기 인도 선표(delivery slot)가 희귀한 상황이라, 선주 입장에서 신조 계약을 체결하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몇몇 업체들이 대규모 발주를 감행하며, 조선업계 캐파가 극한까지 치닫고 있습니다.
빅3 진검승부 시작···가격경쟁 시대에서 기술경쟁 시대로
국내 조선업이 제2의 부흥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호황을 맛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쇠퇴하던 조선산업은 최근 다시 밀려드는 일감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정부 관리 아래 놓였던 대우조선해양이 한화그룹에 인수돼 한화오션으로 새 출발하면서 조선 '빅3' 체제가 다시 공고해지는 모습입니다. 최근 수주 경쟁도 한껏 치열해지면서 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사 간 진검승부가 본격화할 거란 전망이 우세해졌습니다.
국내 조선업의 기대감이 커지는 배경은 HD현대를 중심으로 올 상반기 수주 실적이 예상치를 뛰어넘은 게 한몫 더해졌습니다. 올 들어 조선 3사 수주 현황을 보면 HD한국조선해양은 88척을 수주했습니다. 올 1~5월까지 누적 수주 금액은 104억8000만 달러로 연간 수주 목표(157억4000만달러) 66.6% 잠정 달성했습니다. 2위 삼성중공업은 5척(25억 달러)을 수주하며 연간 수주 목표(95억달러)의 26% 달성하며 순항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화에 매각이 진행되던 대우조선해양은 5척 수주에 그쳤는데 수주 금액은 10억6000만 달러로 3사 중 가장 낮습니다. 연간 수주 목표(69억8000만 달러) 대비 15.2%에 그쳐 주춤했지만 한화오션으로 새 간판을 달고 수주 몰이에 속도를 붙인다는 목표입니다. 한화오션은 모기업의 사업 시너지를 기반으로 연내 흑자 전환을 이뤄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현재 한화오션은 10개 분기 연속 적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한화오션아 한화에 편입돼 조속한 경영정상화에 나설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한화오션은 지난 23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권혁웅 최고경영자(CEO) 선임을 비롯한 이사회 운영진 선임 등을 거쳐 공식 출범했습니다. 권 CEO는 임직원들에게 보낸 CEO 메시지에서 "한화오션의 장점인 기술 중심의 우수한 문화를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친환경 기술 기업, 세계 최고의 경쟁력으로 안정적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육성해 나가겠다"며 사업 의지를 다졌습니다.
한승한 SK증권 연구원은 "한화오션은 LNG, 수소, 암모니아, 해상풍력 등 한화그룹과의 시너지가 장점"이라며 "선박 및 해양플랜트 수주, 한화의 방산업체와의 시너지를 통한 특수선(잠수함 등) 수주가 기대된다"고 평가했습니다.
2년간 적자를 맛봤던 HD한국조선해양은 2년 전부터 수주한 조선 자회사들의 건조물량 증가 및 선가상승 영향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 연간 40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거둘 거란 기대감이 나옵니다.
올 1분기 196억원 영업이익을 거둔 삼성중공업도 올해는 2015년 이후 9년 만에 연간 흑자 달성에 청신호를 켜고 있습니다. 증권가에선 올해 연간 영업이익을 1300억~1700억원 수준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영국 조선해운시황 전문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선박 발주량은 4278만CGT(Compensated Gross Tonnage·표준화물선 환산 톤수)였습니다. 국내 조선사는 이 중 1627만CGT(38%·289척)를 수주해 중국(2082만CGT, 48.7%·728척)에 이어 2위를 기록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세계 시장에서 87%에 달하는 수주 점유율을 올려 사실상 양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보다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에 있는 만큼 선박 발주 및 수주는 앞서 있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친환경 선박, 스마트십 등 기술 경쟁력은 중국이 아직은 한국과 격차가 있다는 게 업계 평가입니다.
국내 조선 빅3가 불황을 이겨내고 턴어라운드에 나선 배경 또한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의 대규모 수주 효과 때문이란 분석입니다. 부가가치가 큰 LNG운반선은 가격보단 기술 경쟁력이 우선시되는 선종이다. 중국도 건조 기술은 갖고 있지만 한국이 절대 우위에 있습니다. 지난해 전세계 대형 LNG 선박 발주량(1452만CGT, 168척) 부문에서 한국은 무려 70%(1012만CGT 117척)를 휩쓸며 고부가가치 선박 기술 강국의 면모를 입증했습니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규제 강화로 전 세계 선박 발주량 중에서 친환경 선박 비중은 2021년 32%에서 지난해 62%로 급증했습니다. 한국이 친환경 선박 수주에서 중국을 압도하면서 국내 조선업계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던 저가 수주 우려도 줄어들 거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HD현대 관계자는 "현재까지 전세계 시장에서 발주가 된 메탄올 추진선 중 50%(50여척) 이상을 HD한국조선해양이 가져갔다"고 말했습니다.
HD한국조선해양은 HD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 조선 자회사와 함께 2030년까지 '지능형 자율운영 조선소'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선박 설계부터 인도까지 모든 공정에서 시뮬레이션 검증을 통해 불필요한 공정 지연과 재고를 줄이고, 최신 스마트 기술과 로봇을 도입해 생산 효율성을 높인다는 전략입니다.
향후 수소 운반선 상용화에 앞서 초기 기술 개발도 진행 중입니다. HD현대는 지난해 말 수소엔진의 첫 단계인 1.5MW(메가와트)급 LNG·수소 혼소엔진을 개발했습니다. LNG·수소 혼소엔진은 디젤연료와 LNG·수소 혼합 연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해 유해 배기가스 배출량을 크게 줄인 친환경 엔진입니다. 올해 수소 비중을 더 높인 혼소엔진 개발을 완료한 뒤 2025년까지 선박용 수소엔진 개발을 마친다는 목표입니다.
삼성중공업은 노르웨이 '콩스버그'사와 차세대 자율운항 LNG운반선 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이 선박에는 최신 원격자율운항기술 및 저탄소 기술이 장착됩니다. 삼성중공업은 또 FLNG(부유식 천연가스 생산 액화 저장 플랜트) 부문에서 독보적인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습니다. FLNG 사업은 육상플랜트에 비해 투자비가 적고 환경 친화적이며 이동이 용이해 삼성중공업의 경우 시장 확대가 기대되는 먹거리입니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LNG 이후의 대체 연료라고 하는 친환경 후보군(메탄올, 암모니아, 수소, 연료전지) 선박을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며 "탄소 및 온실가스 줄이는 방향으로 국제사회가 2050년을 향해 가고 있는 만큼, 거기에 걸맞은 친환경 선박 기술을 확보해야 하고 그것이 '제2의 LNG운반선'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신형 대한조선학회 학회장은 "조선업계는 앞으로 그린수소, 원자로 등 대체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